성경지리 이문범 교수(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지리적 요충지이자, 갈릴리의 관문
가버나움 해변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산지에 위치한 하솔은 ‘둘러싸인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솔은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1750년경)부터 철기 시대(주전 900년대)까지 가나안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특히 주전 2000년경 힉소스 왕조 시기에는 갈릴리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도 북방의 핵심 거점 역할을 감당했다. 이는 하솔의 독보적인 지리적 가치 때문이다.
당시 고대 무역로인 ‘해변 길’(Via Maris)이 훌라 분지의 늪지대에 가로막히면서, 도로는 자연스레 갈릴리산지와 분지 사이의 좁은 길로 모이게 됐다. 하솔은 바로 그 길목의 출입구를 지키는 영광스러운 요새였다.
가나안의 머리에서 앗수르의 패전지로
성경은 하솔을 가나안 북부의 패권을 쥔 ‘모든 나라의 머리’라고 기록한다. 여호수아의 북부 정복 전쟁 당시 연합군의 우두머리였던 하솔은 결국 여호수아에 의해 불탔으나, 사사 드보라 시대에 이르러 다시 세력을 키워 철 병거로 이스라엘을 압제했다.
이후 솔로몬왕은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고, 요새와 병거 성을 세워 북방 방어선이자 무기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아합왕 역시 이곳을 다시 요새화하며 수비를 강화했으나, 결국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함락된다. 이스라엘 최대 규모의 텔(Tell)인 하솔은 솔로몬의 므깃도와는 또 다른 독특한 지하 수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다시 건설된 솔로몬과 아합의 요새
하솔은 상부 텔과 그보다 3배나 더 넓은 하부 텔로 나뉜다. 현재 주로 발굴된 상부 텔에는 이스라엘 시대의 유적과 가나안 왕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부에서 하부로 내려가는 경사로에서는 종교 의식을 행하는 광장과 제단이 발견됐다.
경사지 유적 뒤편에는 솔로몬 특유의 ‘방이 6개인 성문’이 있는데, 성문 아랫부분을 발굴하기 위해 원래 위치에서 약간 북쪽으로 옮겨 온 성문이다. 성문을 지나 가나안 왕궁 입구에 서면, 성전의 보아스와 야긴을 연상시키는 큰 기둥 받침 두 개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붕으로 보호된 왕궁 내부에는 여호수아가 하솔을 불태웠던 당시의 화력을 증명하듯, 1m가 넘는 잿더미와 열기에 쩍쩍 갈라진 현무암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왕궁 뒤에는 하솔의 유일한 상수 시스템이 있는데, 주전 9세기 아합왕 기간에 건설됐다.
하솔의 갈라진 돌들이 보내는 경고
가장 뼈아픈 유적은 왕궁 뒤편의 북쪽 신전이다. 여호수아가 그토록 철저히 파괴했던 가나안의 우상과 주상들이 이스라엘 시대에 다시 등장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우상의 문화가 수 세대가 지난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하솔은 과거 가나안이 그랬듯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죄의 습성이 우리 신앙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하솔의 갈라진 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침묵의 경고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