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장주영 집사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모태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이라는 분에게 관심조차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너무 사랑했었다. 엄마가 ‘엄마의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눈물로 기도하시면, 나는 ‘도대체 그분은 어디 계시지? 저렇게 숨넘어갈 듯 부르는데 대답은 왜 안 해주시지?’라는 생각을 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는 엄마의 어리석은 확신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그분은 ‘수리 불가의 완전한 불량품’인 나를 교회 공동체로 이끄셔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을 하게 하시더니, 또 3년 전에는 제자훈련의 기회까지 열어주셨다.
제자훈련을 신청한 후 인터뷰를 보던 중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져버린 나는 그날 이후 무작정 큐티책을 펴들었다. 예전에는 가끔 생각나면, 소설책 읽는 기분으로 읽으며 넘어가던 <날마다 솟는 샘물>이었는데, 막상 큐티를 하려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0~12a)는 본문으로 큐티를 하게 되었다.
그 순간 갑자기 ‘도둑같이 온다는 그날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는데, 난 왜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과거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하나씩 떠올랐다. 주일도 지키지 않고 놀러 갔던 일, 순장님께 온갖 핑계를 대며 다락방을 빠진 일, 교회 일에 충성하는 지체들을 마음속으로 비판하고 정죄했던 일, 좋은 옷과 가방에 목숨 걸었던 일 등등. 큐티하며 받았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신약통독을 위해 성경을 펴는데 유독 내 눈이 머무는 말씀이 있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5~19) 나는 이 말씀을 읽자마자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행위를 아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셔서 책망하신다는 그 말씀이 내 심령을 찔렀다.
이 모든 말씀은 부족한 나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며, 주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그날의 산 경험은 내게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그 사람의 묘비에 적힌 말로 그 사람의 생전을 평가한다고 한다. 내 묘비엔 어떤 말을 적어 넣을까? ‘죽는 순간까지 큐티한 여자, 여기에 잠들다!’는 어떨까라는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