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26년 07월

영예가 아니라, 다시 무릎 꿇으라는 부르심

발행인칼럼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오정현

목회의 세월이 깊어질수록 뼈에 사무치는 것이 있다. 목회자는 사람들 앞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하고, 교회를 이끌기 전에 먼저 주님의 손에 이끌려야 하며, 양들을 섬기기 전에 먼저 목자장이신 주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내어놓아야 한다.

 

지난 5월,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내게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1929년 존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 자유주의 신학의 거센 흐름 속에서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복음,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대가를 치르며 이 학교를 세웠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았다. 자원도 부족했고, 부지도 넉넉하지 않았으며, 세상적 명성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진리만 붙들고 사역했다.

 

이번 명예 박사 학위는 내게 지난 목회의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처음 부르심의 자리로 다시 서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네가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은혜로 여기까지 인도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 앞에 서라.”

 

특별히 이 학위는 한국교회와 사랑의교회에 허락하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신학의 뼈대를 세운 박윤선 목사님께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이어 사랑의교회 초대 담임목사이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그 영예를 받으셨다. 그리고 이제 사랑의교회 2대 담임목사인 내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이 사실은 내게 너무나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을 준다. 한 개인의 이름이 높아지는 일이 아니라, 말씀 중심, 제자훈련, 세계 선교, 개혁주의 신앙 계승이라는 사명의 바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레샴 메이첸이 임종 전에 영적 동지였던 존 머리(John Murray)에게 남긴 고백은 지금도 내 마음을 붙든다. “나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에 너무나 감사한다. 그것 없이는 희망이 없다(I’m so thankful for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이 말 속에 복음의 심장이 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 인간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위에 교회가 선다는 고백이다.

 

1979년 내수동교회 대학부 인도자로 부름받은 후 47년 간 사역의 길을 돌아보는 지금, 내가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희망이 없다”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에 기대지 않으면 나의 목회는 단 한순간도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이 학위는 내게 주어진 영예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사랑의교회에 맡기신 제자훈련과 세계 선교의 사명에 다시 불을 붙이시는 은혜의 표징이다. 복음을 붙들고 열방을 향해 더 낮고 더 깊이 섬기라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나는 이 학위를 사랑의교회 성도들과 함께 받았다. 순장들과 제자훈련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수고한 수많은 제자훈련의 동역자들과 한국교회를 섬겨 온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받은 것이다. 

 

지난 반세기에 가까운 목회를 돌아보면, ‘목회자는 결국 은혜에 빚진 자’라는 사실이다. 내가 양들을 붙든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나를 붙드셨다. 내가 교회를 섬긴 것 같지만 사실은 교회가 나를 목회자로 빚어 주었다. 내가 사명을 감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사명이 나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다시 고백한다. 주님께서 하셨고, 주님께서 붙드셨으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그리고 남은 길도 주님의 은혜로만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