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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든 만남은 주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이루어졌다!

2012년 08월 우은진 기자

인물 : 한국WEC선교회 이사 옥인영 장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주님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다
한국WEC선교회 이사 옥인영 장로(사랑의교회)는 지난 66년간의 세월을 통해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깊으신 뜻을 두고 계시며, 우리가 그 뜻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 복음화다. 그가 중국 복음화의 소원을 품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쁘신 뜻을 위해 옥 장로의 삶 속에 여러 만남을 계획하시고, 그 만남을 통해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셨는지 그 인도하심의 길을 한번 따라가 보자.


중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의 만남
그는 특이한 집안 내력을 소유하고 있다. 모태신앙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중국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의사 출신이다. 중국인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염색공장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 중국 항일운동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네덜란드 선교사가 세운 허저교회에서 외할아버지를 숨겨 준 것이 인연이 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신앙적 배경에서 어머니가 중국인이었지만 모태신앙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북경경도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상황이라 귀국하지 않고 중국 천안문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당시 산동의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던 어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일본어와 중국어가 모두 능통했던 아버지로부터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일본어를 배우면서 아버지와 결혼에 이르게 된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아버지가 일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해방과 피난길에서의 만남
그러나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밝히게 되는데, 어머니는 신분을 속인 아버지로 인해 큰 실망을 했다고 한다. 이윽고 그들은 잠시 고국에 계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 미국 배를 탔지만 배 안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배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군산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 배 안에 의사는 부모님 두 분뿐이었는데, 아편 중독자들이 콜레라로 사망한 아이의 죽음을 약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웠다.
아버지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몰매를 맞았고, 어머니는 당시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미군 중위가 아버지를 군산 도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주었고, 마침 군산에 환자들이 많고 일본인들이 하던 병원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곳에서 진료를 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다. 그래서 1946년 7월, 그의 아버지는 군산에서 복민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런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어머니는 중국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인이었던 어머니는 한국말도 잘 못하면서 눈물 젖은 타향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큰 도시에서 자녀를 교육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사할 계획이었지만 곧 6·25가 터져 아버지가 먼저 피신을 해야 했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남게 된 그는 피난길에 북한군에 납치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본부 중공군이 어머니가 중국인 의사인 것을 알고, 통행증을 끊어 주어 죽음을 피하게 되었다. 부산에 정착한 가족은 부산중앙교회를 다니며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에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옥 장로는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성도교회를 다니며, 고(故) 옥한흠 목사와 만나게 된다. 


옥한흠 목사와 제자훈련과의 만남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는 옥한흠 목사를 통해 큰 부흥을 이루고 있었다. 젊고 지적이며 열정적인 옥 목사의 설교와 한 영혼 한 영혼을 터치하는 제자훈련은 당시 많은 대학생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옥 장로는 본과 3학년으로 대학부 생활보다는 병원생활에 더 집중해야 했다. 또 옥한흠 목사가 유학길에 오르고 본인도 해군 복무를 하면서 소식이 뜸하다가, 유학을 마치고 강남에서 교회를 개척한 옥 목사를 우연히 다시 만나 지금의 사랑의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옥 장로는 당시 옥 목사가 제자훈련 1기로 훈련을 받는 남자 훈련생들을 차에 태우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녔다며 옥 목사의 열정을 회고했다. 그 덕분에 너무 고된 훈련을 받아 당시에 생긴 신앙생활 습관이 지금까지도 굳게 자리 잡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1기 남자 훈련생 6명은 1982년 사랑의교회 장로 1기로 세워졌다. 그러나 그는 1981년 영국 옥스퍼드로 유학을 가게 되어, 곧바로 사역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는 유학비가 비쌌던 미국보다 유학비를 지원해 주던 영국문화원을 통해 영국 유학 장학생 시험을 쳤다. 마침 해군 병원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미군이 인터뷰 예상 질문을 뽑아 주면서 답을 길게 말하면 유리하다는 조언을 해 줬는데, 그대로 한 결과 통과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인생길에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돕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옥 장로는 최홍준 목사로부터 사역훈련을 받았고, 1988년 사랑의교회 장로 2기로 세워졌다. 


소아정형외과와 스쿼시와의 만남
평소 아이들을 좋아했던 그는 소아정형외과라는 미개척 분야를 선택했다. 부모님이 모두 의사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의대를 선택한 그는 첫 대학 진학 실패 후 두 번째로 가톨릭 의대에 진학했다. 원하던 대학이 아니었기에 불편한 마음을 테니스를 치는 것으로 달랬다.
학교에서 오후만 되면 정형외과 교수들이 테니스를 쳤는데, 자연스럽게 그에게 “정형외과를 전공하라”는 권유를 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청진기 하나로 내과 진료를 하던 것보다는 정형외과가 왠지 더 정확해 보여 정형외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1972년부터 2012년까지 강남성모병원에서 40년 동안 소아정형외과 의사로 헌신한다.
의사로서 한 길을 걷던 그에게도 외도가 있었다. 영국 유학 중 테니스를 접했는데, 주변 동료들이 스쿼시를 쳐도 잘 치겠다고 권유하자 열심히 스쿼시를 했다. 한국에 돌아오자 스쿼시 동호회가 생겼고, 1대 회장을 어느 사업가가 맡았는데 IMF 이후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자리를 내놓자 뜬금없이 옥 장로가 스쿼시연맹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왜 제가 스쿼시연맹 회장을 합니까?” 하고 하나님께 반문했다. 재력가도 아니고, 발도 넓지 않은 의사였던 자신이 왜 스포츠단체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12년간 영국 유학시절에 알게 된 손학규 국회의원을 통해 스쿼시가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세계연맹 회장인 수지 여사를 알게 되어 부산아시아게임과 카타르아시안게임에 스쿼시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실명위기와 WEC선교회의 만남
1990년 그는 스쿼시를 치다가 왼쪽 눈을 다쳤다. 그는 공을 맞는 순간 시력을 잃을 거라고 직감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이제 의사를 못하겠구나.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을까? 의료선교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라는 찬양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3일 후 피가 멎으면서 실명할 줄 알았던 눈은 겨우 실명 위기를 모면했다.
그때 고교 동창생 중 한국WEC선교회에 관여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WEC선교회 일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는 그 제의를 받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이 일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1997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WEC선교회 이사장직을 맡아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헌신했다. 그리고 올 3월 정년퇴임을 한 후부터는 강남역에 있는 WEC선교회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어머니의 노래』 … 새롭게 어머니를 만남
몇 년 전 토요새벽기도회 주보에 초창기 사랑의교회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어머니 이야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홍성사 출판사와 연결이 되었다. 어머니의 전기를 쓰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기도하던 중 마음에 딱 맞는 이유진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군산에서 자란 그 작가는 올해로 71세인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버지가 복민의원을 하던 것이나 군산에 중국 사람이 많았던 분위기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2년 반에 걸친 취재와 집필을 통해 2011년 3월 『어머니의 노래』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가 어머니의 전기를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기고 부끄럽게 여겼던 자신에 비해, 하인스 워드는 2006년 미식축구에서 우승한 후 “어머니가 아니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었다”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어머니가 그동안 말도 안 통하는 한국에서 얼마나 가슴앓이를 하며 살았을지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로서 외면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나님이 “너는 어머니를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야단치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책을 만들면서 어머니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옥인영의 어머니가 아닌 복음을 모르는 중국 동포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중국선교에 대한 만남의 길로
그가 있던 병원에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이 4년 동안 매년 찾아와 교제를 했었는데, 옥 장로는 그 중국 학생들과 중국 싸이월드 홈페이지도 만들어 교제하면서 중국에 대한 마음을 점점 키우게 되었다.
하루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과기대 교수들이 모두 학벌도 좋고 연변에 와서 연탄불 피우며 고생할 사람들이 아닌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온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라는 간증을 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사랑의교회 중국어예배부에서 중국어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다. 덕분에 중국어 성경을 더 자주 보게 되었고, 중국선교에 대한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부터 백석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WEC선교회 상근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평신도보다는 목회자로서 사역의 전문성을 보완하고자 한다. WEC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중국인 8,500만 명의 디아스포라를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 밖에 있는 화교교회는 재정이 좋지만 선교마인드가 약하다. 그는 중국선교는 중국 사람이 가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 화교교회에서 선교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고, 이때 주님은 그에게 평신도로서 간증을 하기보다는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비전을 주셨다.
2011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세계 화인복음대회에 참여하면서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생전에 어머니가 한국대표로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의 노래』가 중국어로 번역, 출판할 수 있는 기회의 문도 열렸다. 그는 어머니가 60세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없는 화교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며 섬기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낯선 한국 땅에 와서 주님을 의지하며, 중국 동포들의 복음화를 위해 군산과 서울 화교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섬기셨던 것이다. 그는 “중국인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66세까지 살면서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모국을 위해 저의 인생길을 인도해 오심을 목격하게 되었고, 주님의 뜻을 위해 가슴 속에 소원을 주시고 행동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Vol.91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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